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漫步人生 - [密敎人物思想史 Part_12] - 혜통국사...!

♥ VajraYana ♥ 2011. 7. 10. 06:30

 

 

 

1)혜통형태의 밀교

순수밀교를 전래한 사실이 확실한 혜일대사, 「관정경」의 호국적 문두루법을 전한 명랑법사와 더불어 신라에 또 다른 형태의 밀교를 전래한 인물로 혜통국사가 있다. 그에 대해서는 『삼국유사』「혜통강룡조」에 출가동기를 시작으로 재당행적(在唐行跡)및 귀국후의 행적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내용에서 혜통 특유의 스타일이 나타나고 있다.

결론부터 맡하면 질병이나 재앙의 원인을 원한에 사무친 망령이나 용귀(龍鬼)의 해(害)로 보고 그 원한을 풀어 질병과 재앙을 소멸하는 해원주술(解怨呪術)과 주술의 가장 기본형태인 모방주술에 전통했던 인물이 혜통국사였다는 것이다. 이제 그러한 사례를 「삼국유사」의 「혜통강룡조」에서 찾아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2) 모방주술의 사례

①당나라 황실의 공주가 병들어 고종이 혜통의 스승(삼장)을 청해 구원케 하니, 스승(삼장) 은 혜통을 천거하여 대신하게 했다. 혜통이 명을 받고 또 처소에 가서 횐콩 한 말을 은그룻에 담아 주문을 외우니 콩이 흰 갑옷을 입은 신병(神兵)으로 변하여 병의 근원을 쫓았으나 이기지 못하고. 다시 검은 콩 한 말을 금그릇에 담아 주문을 외우니 검은 갑옷을 입은 신병으로 변했다. 흑백 두 빛이 힘을 합쳐 병을 쫓으니 홀연 용이 나와 달아나고 병은 나았다.

②용은 혜통이 자기를 쫓은 것을 원망하여 혜통의 본국 문잉림(文仍林)에 와서 더욱 악독하게 인명을 해쳤다. 그때 정공(正恭)이 당에 사신으로 왔다가 혜통에게 이르기를 「스님이 쫓은 독룡이 본국에 와서 해독이 심하니 속히 가서 제거하십시오」하였다. 이에 혜통이 정공과 함께 환국하여 용을 내쫓았다.

③정공에게 원한을 품은 용이 복수하기 위해 정공으로 하여금 왕의 명을 거역케하고 처형당하게 하는데 그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왕화상(혜통)은 정공과 친했으니 의당 혐의를 가질 것이니 먼저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군사를 보내어 찾아 잡아오라 했다. 그때 혜통은 왕망사(王望寺) 에 있다가 군사가 오는 것을 보고, 사기병과 붉은 붓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 외치기를 「너희는 내가 하는 것을 보라」한 뒤에 붓으로 병목에 줄을 하나 긋고 또 이르되 「너희는 각각 너희의 목을 보아라」하여 군사들이 서로 보니 목에 모두 붉은 줄이 있었다. 서로 바라보고 크게 놀라는데 또 외치기를 「내가 만일 이 병목을 끊으면 너희 목도 끊어질 것인데 어떻게 하겠느냐」 하니 군사들이 일제히 달아났다. 목의 붉은 줄을 왕에게 보이고 아뢰니, 왕이 가로되 「왕화상의 신통력을 어찌 인력으로 도모할 수 있겠느냐」하고 그대로 놓아두었다.

3) 해원주술의 사례

① 용은 정공에게 원한을 갚고서 기장산(機長山)으로 가서 웅신(態神)이 되어 더욱 심하게 참독을 끼쳐 백성이 많이 다쳤다. 혜통이 이에 산으로 가서 용을 타일러 불살계(不殺戒)를 주니 웅신의 해독이 멎었다.

② 신문왕이 등창이 나서 혜통에게 보아달라 청하였더니, 「해통이 주문을 외우자 금시에 나았다. 이에 혜통이 「폐하께서 전일 재상으로 계실 때에 잘못 판단하여 착한 사람인 신충 (信忠)을 종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신충의 원한을 사서 생생(生生)에 업보를 짓는 것이라, 지금의 등창도 역시 신충 탓입니다. 마땅히 신충을 위해 절을 지어 명복을 빌어 원한을 풀어 주소서」하였다. 왕이 옳다고 여겨 절을 지어 이름을 신충봉성사(信忠奉聖寺) 라 하였다. 절이 이루어지매 공중에서 외치기를 「대왕이 절을 지어 괴로움을 벗고 천상에 나게 되었으니 원한이 이미 풀렸다」하므로 그 외친 자리에 절원당(折怨堂)을 지었으니, 지금도 당과 절이 모두 남아 있다.

4) 출가동기

출가전 그는 서라벌 남산의 서쪽 기슭 은천동(銀川洞) 어귀에 있었다. 하루는 집 동쪽 시내에서 수달피 한마리를 잡아서 뼈를 동산에 버렸는데 이튿날 아침에 보니 뼈가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다. 그래서 핏자국을 따라 찾아가니 옛 굴로 돌아가서 새끼 다섯마리를 안고 웅크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혜통은 비록 짐승일지라도 죽어서도 새끼를 못잊어 간 모성애 앞에 심각한 생명의 아픔을 느끼고 죽은 어미의 품에 안겨있는 수달의 새끼들을 등지고 돌아서면서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 그 길로 그는 이 생명의 아픔을 풀기 위해 출가를 결심하였던 것이다.

이 해통의 출가동기가 모방주술과 해원주술에 능했던 혜통의 밀교 성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