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漫步人生 - [密敎] - 티베트 밀교의 역사...!

♥ VajraYana ♥ 2011. 7. 10. 08:28

1. 삼예의 종론

티베트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국교로 정해지는 것은 명군으로 알려진 티송데첸(742-797)왕 때의 일이지만, 이미 송첸감포(581-649)왕 시대에 불교는 티베트에 전해진다.
불교의 전래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송첸감포왕의 중국과 네팔에서 맞아들인 부인들이다. 송첸감포왕은 그의 아들인 궁송궁첸(621-643)왕의 부인으로 唐에서 文成公主를 맞이하지만 궁송궁첸왕이 일찍 죽은 까닭에 후에 문성공주를 자신의 비로 맞이한다.
문성공주는 죽은 자신의 남편인 궁송궁첸왕을 위해 라사에 라모체사(Ra mo che, 小招寺)를 건립하여 중국에서 가져온 불상을 안치하고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송첸감포왕의 또 다른 부인인 네팔계통의 티춘(khri btsun)왕비도 남편인 송첸감포왕이 죽은 뒤 투르낭(Phrul snang, 大招寺)사를 건립하여 망부의 명복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이와같이 중국과 네팔의 두 왕비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었지만 실제 송첸감포왕이 불교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티베트에 전래된 불교가 새로운 계기를 맞이한 것은 약 반세기를 지나 중국에서 金城公主가 들어온 뒤 부터다. 열성적인 불교신자였던 그녀는 남편인 티데축첸(704-754)왕을 설득시켜 황폐해진 라모체사와 투르낭사를 복구 시키고 또한 새로운 절을 세우게 했다. 아울러 중국에서 승려를 초빙하여 머물게 하였다.
이러한 갑작스런 불교의 움직임에 대해 당시 본교(티벳 전통종교)도를 중심으로한 반불교세력의 저항도 나타나지만, 왕비의 노력은 티베트에 불교가 정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티테축첸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모든 사정은 변하여, 실권을 잡은 반불교세력은 사원을 파괴하고 승려를 추방하는 등 불교 전래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가고자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왕위에 오른 사람이 나이 어린 티송데첸왕으로 그에 의해 불교는 비로서 티베트 사회에 정착하게 된다. 티송데첸왕은 성년이 되자 권신들에 의한 파불정책을 배척하고 불교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결심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선왕인 티데축첸왕에 의해 중국에 파견되어 불교를 배워온 여러 사람들이 있었으며, 특히 그 중에는 삼예의 종론 때에 불교계의 최고지위에 오른 페르양(dPal dbyangs)도 포함되어 있었다.
페르양은 중국에서 귀국 도중 淨衆寺 無相 金和尙을 만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하지만 불교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결심한 티송데첸왕은 신하로 하여금 당시 네팔에 체재하고 있던 나란다사원의 대학장인 샨타라크시타 (725-783)를 티베트에 초청하는데 성공했다.
다시말해 티송데첸왕은 인도불교를 티베트 불교의 근간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산타라크시타는 <섭진실론> <중관장엄론> 등을 지어 이미 명성이 높았던 인물로 특히 이 샨타라크시타의 사상은 후에 제자인 카발라실라의 사상과 더불어 티베트 불교 사상의 바탕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티베트에 들어간 샨타라크시타는 그다지 오랫동안 머물지는 못하고 다시 네팔로 돌아오게 되며, 후에 다시 왕의 초청으로 티베트에 들어가게 된다. 두번째로 티베트에 들어갈 때 샨타라크시타는 파드마삼바바를 동행하였으며, 이 파드마삼바바의 주술적 능력에 의해 당시의 반불교세력이 제압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와같이 하여 불교 도입의 틀이 형성된 티베트는 775년경 부터 왕의 명령으로 삼예 대승원이 건립되고 대본당이 완성된 779년에는 샨타라크시타가 계사가 되어 최초로 티베트인에게 구족계가 주어져 티베트에 최초로 승단이 형성하게 된다.
이와같이 티베트는 인도불교를 바탕으로 한 불교의 전개가 이루어지지만 중국과도 왕비의 혼인등 밀접한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당시 티베트가 대단히 강성하여 토번제국으로 불릴 정도로 강력했던 것에 연유하는 것으로 특히 786년경에는 돈황을 함락시켜 기세를 드높였다. 이 돈황 함락을 계기로 티베트에 들어온 사람이 중국의 선승 마하연으로, 그의 <不思不觀>의 선은 당시 티베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마하연은 왕비의 후원을 얻어 크게 세력을 떨쳤지만, 이미 형성된 인도불교에 바탕을 둔 승단과 왕에 의해 한때 선종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선종 측의 강력한 항의와 자살하는 자가 속출하는 사태에 이르러 해금령이 내려지고 이러한 사태를 계기로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왕에 의해 시도된 것이 바로 삼예의 종론이었다.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의 대립은 이미 샨타라크시타에 의해 예견되어진 일로서, 산타라크시타는 유언으로 후에 그러한 논쟁이 일어나면 자신의 제자인 카말라실라(740-797)를 부르도록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샨타라크시타의 유언을 기억한 티송데첸왕은 신하로 하여금 카말라실라를 부르도록 하고, 삼예 사원에서 논쟁을 시켜 진 쪽은 티베트를 떠나도록 명령하였던 것이다. 이 삼예 사원의 논쟁이 곧 삼예의 종론으로 이는 티베트 불교의 향방이 걸린 운명적인 대사건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유명한 부든(Bu ston)의 <불교사>에 의하면 이 논쟁은 티송데첸왕 앞에서 마하연이 먼저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그에 대해 카말라실라가 또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으로 진행됐다. 먼저 마하연은 일체 행위를 부정하고 <불사불관>에 의한 돈오를 설하는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이것에 대해 카말라실라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불사불관>은 기절의 상태와 같은 것으로, 그것은 반야에 대한 智마저도 버리는 것이라고 논난한다. 또한 카말라실라는 無分別智란 단순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체법은 무자성이다라는 명확한 언어표현을 동반한 공성의 智가 장기간의 수행을 통하여 순차적으로 달성되어 얻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같이 돈오적인 마하연의 선종과 수행 자체적인 카말라실라의 논쟁은 반복되었지만, 결과는 결국 카말라실라의 승리로 돌아가고 마하연은 돈황으로 추방된다. 카말라실라의 승리로 인해 티베트 불교는 인도불교적인 방향을 명확히 견지하게 되었고, 아울러 카말라실라가 남긴 <수습차제> 3권은 후에 아티샤, 총카파에게도 영향을 주어 티베트 불교사상의 바탕을 이루게 된다.
<삼예의 종론>은 티베트 불교의 향방을 결정한 중요한 사건으로 이는 도불교와 중국불교의 대립, 점수와 돈오의 대립 등으로 달리 표현할 수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방향을 확립한 티베트불교는 이후 인도불교문헌의 본격적 번역과 연구등이 이루어져 불교국가로서 기틀을 확립시켜 간다.

2. 아티샤의활약

삼예의 종론으로 불교의 향방을 정한 티베트는 티송데첸 왕의 죽음(797) 으로 일시적인 파불상태에 직면하였지만, 9세기에 들어와서는 본격적인 불교국가로서 발전하였다.
인도불교의 경론이 다수 번역되어진 것은 물론 804년 티데송첸 왕(776-815)은 唐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한역불전의 번역도 아울러 촉진시켰다. 그 후 카르충에 불전을 건립하고 다시 숭불서약의 조칙을 발포해 신하들에게 서명케 하였다. 역경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번역어의 통일을 위해 결정역어를 수록한 어휘집 <飜譯名義大集>을 편찬하고, 이어서 814년에는 이들 어휘 가운데 문제가 되는 것을 해설한 <二卷本 譯語釋>이 편찬되었다.
터데송천왕을 이은 티축데첸(806-841)왕 시대에 불교는 더욱 융성하였다. 824년에는 티베트 최초의 역경목록인 <덴카르마 目錄>이 만들어져 그때까지 번역된 경론이 정비되었다.
그리고 이 왕시대에 불교에 대한 우대는 더욱 두드러져 출가자 1인에 7戶의 예민이 주어지는 등 극단적인 우대책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우대책으로 불교가 발전된 것은 사실이지만 국가 재정에 영향을 주어 후에 토번제국이 와해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티축데첸 왕 이후 다르마왕은 파불을 단행하였고, 그리고 그의 사후 일어난 왕조 내의 분열은 토번제국을 와해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토번제국의 붕괴와 함께 불교교단도 경제적인 기반을 잃고 사실상 해체된다. 이는 티송데첸왕 때에 형성된 티베트 불교교단이 토번제국의 붕괴와 함께 국가의 통제력을 상실하게 된것을 의미한다.
이후로 불교교단은 각 지역의 씨족 세력과 결탁하여 독특한 형태의 종파불교를 형성하게 된다. 843년경 토번제국 붕괴뒤 대략 2세기에 걸친 혼란기를 경계로 티베트 불교의 역사는 前傳期(snga dar)와 後傳期(phyi dar)로 나누어진다.
전전기의 불교가 국가의 통제력 아래 있었던 국가불교라고 한다면, 후전기의 불교는 국가의 통제력이 상실된 채 독자적으로 전개되는 종파불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2세기에 걸쳐 국가 통제력이 상실된 혼란한 상황에서 전개된 티베트 불교는 인도불교 후기의 밀교 영향이 뚜렷하지만, 그것은 체계적으로 전승된 밀교 교학이 아니라 잡박하고 실천적인 탄트라 경전이 개별적으로 전해져 티베트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미 전전기의 <이권본역어석>의 서문에서도 특히 性的 실천을 포함한 <無上僧伽탄트라>의 부류로 분류되는 탄트라 경전에 대해 번역을 금지하는 내용이 나타나지만, 이러한 탄트라 경전류가 국가의 통제력을 잃은 상태에 있던 티베트인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러나 삼예의 종론으로 불교의 방향을 정립한 많은 티베트인들에게 국가의 통제력 상실속에서 유행하는 탄트라 경전들이 우려와 걱정을 일으키게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잡박한 교리의 亂舞 속에 후전기의 불교역사는 계율과 불교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한 불교교단의 재흥을 목표로 전개된다.
후전기의 티베트 불교는 먼저 계율부흥운동과 뒤이어 아티샤(Atisa, 982-1054)의 활약으로 시작된다. 불교의 재흥을 원하는 사람들은 먼저 출가 승단의 확립과 계율 전통의 부활이 급선무임을 자각하였고, 이러한 자각은 11세기초 티베트의 동부와 서부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동부에서는 캄(Khams) 지방을 중심으로 계율의 전통이 되살아났으며, 서부에서는 가리(mNga ris) 지방을 중심으로 계율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와같이 하여 교단의 상태가 정비되자 가리왕인 장춥외(Byang chub od) 는 인도 비크라마실라 승원의 대학승인 아티샤를 티베트에 초청했다. 아티샤는 벵갈지방의 샤호드국 왕자 출신으로 가리왕의 초청을 받았을 때는 <入二諦論> <中螟敎誡論> 등을 지어 이미 그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 초청에 응한 아티샤는 1042년 서티베트의 토딩에 도착하여 그 곳에서 린첸 상포를 만나 장춥외의 요청으로 <菩提道燈論>을 저술하였다.
이 <보리도등론>은 깨달음에 도달하는 수행도를 밝힌 것으로, 그 내용은 聲聞乘章.波羅蜜乘章.眞言乘章의 순서로 구성되어있다. 아티샤는 먼저 사람들에게는 下士.中士.上士의 세 부류가 있어서 하사인 人天乘과 중사인 성문 연각의 二乘, 상사인 大乘은 각각에 적합한 수행을 함으로서 깨달음에 이른다고 설하고 있다.
그리고 대승보살의 깨달음은 계율을 바탕으로 삼매에서 이루어지며 아울러 그 수행의 깊이는 바라밀승에서 진언승으로 순차적으로 깊어져 간다고 말하고 있다.
수행에 대해서는 바라밀승장에서 보이듯 순차적인 방법으로서 次第와 修習이 강조되며 특히 無分別의 正觀외 수습은 菩薩地에 들게 하는 것으로 이러한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붓다와 같은 깨달음은 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바라밀승의 수행이 궁극에 이르는 사람에게 진언승장에 의한 수행이 필요하고, 진언승에 의해 불교의 수행이 완성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와같이 불교의 수행을 설하는 <보리도등론>은 장춥외 왕뿐만 아니라 당시의 티베트인들에게도 크게 환영을 받았으며 혼란기의 티베트 불교교학을 체계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티샤의 13년간에 걸친 포교와 그의 주위에 모여든 티베트 승려들의 활동은 불교가 재흥하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그러나 출가자 집단이 출현하였어도 교단을 통일적으로 원조하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아 각 집단은 지역의 특정한 씨족과 결합하여 독특한 종파불교를 형성하였다.

3. 티베트밀교의 분파

티베트 불교를 특징짓는 하나의 특색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곧 불교의 종파적 전개이다. 그리고 이 종파적 전개는 인도나 중국과는 달리 티베트 각지역에 오랫동안 뿌리내린 씨족 집단과 사원이 밀접히 결부되어 전개해 가는 특색을 보이고 있다.
티베트에 등장하는 최초의 종파는 아티샤의 사상을 잇는 카담파이지만 이 카담파가 성립하는 11~12세기를 중심으로 다수의 불교종파가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불교 종파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 카담파를 비롯해 카규(Kagyu)파, 닝마(nyingma)파, 사캬(sakya)파, 겔룩(Gelug)파를 들 수 있다.
카담파는 아티샤의 제자인 돔톤이 라뎅에 밀교도량을 세움으로서 시작된 것이다.
이 돔톤의 제자들 가운데서 밀교의 실천을 중시하는 敎誡派와 현교중심의 敎說派가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카담파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티샤를 라사에 초빙하여 그의 제자가 된 곡.렉폐셰랍이 1073년 상푸寺를 세운 것이다.
카담파 중 상푸寺에 속하는 학지를 秘訣派라고도 부르지만, 이 절은 렉페셰랍의 조카인 로덴셰랍(1059-1109)과 차파 최키셍게(1109-65)가 座主이었던 시대에는 전티베트를 대표하는 학문寺로서 이름을 떨쳤다. 로덴셰랍은 캐시미르에서 17년간 공부한 명번역가로 알려져 있으며, 논리학과 여래장사상, 중관사상 등의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차파의 학문적 명성도 높았는데 특히 차파는 중관파 가운데 자립논증파를 중시한 학자로 알려져 있다. 이 차파의 학문적 성과를 잇는 상푸사의 교학은 후에 게룩파의 학문사를 비롯해 거의 모든 티베트 사원의 모범이 되었다.
사캬파는 1073년에 곤촉겔포(1034-1102)가 사캬 지방에 절을 세워 일족이 그곳을 거점으로 포교한 것에 유래하는 것으로 씨족 교단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 파는 <헤바즈라탄트라>를 근본경전으로 중시하고 교리적으로는 유식적 색체가 짙은 唯心을 강조하며 수도의 결과를 중시해 부처와 범부가 일치하는 경지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이 파에서는 직계인 쿤가닝포(1092-1158)를 비롯해 소남체모(1142-82), 닥파겐첸(1147-1216), 사캬판디타(1182-1251), 팍파(1235-80)를 5대학자로 간주해 존경한다.
그러나 차파로부터 배운 소남체모부터는 현교중시의 경향이 생겨나 대학자 사캬 판디타(사팡)의 교학이 형성되는 바탕이 되었다. 사팡은 회교도의 난을 피해 1204년 티베트에 들어온 비크라마실라 사원의 대학자 사카슈리바드라 (1127-1225)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수학하여 여러가지 논서를 지었다. 특히 그의 논리학서인 <正理寶藏>은 당시 우세하였던 차파의 논리학설을 압도하여 티베트에 다르마키르티의 논리학서를 보급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사팡은 티베트의 여러 사원이 몽고의 공격을 받아 곤경에 처했을 때 티베트의 대표로 몽고왕과 회담을 하였다. 특히 그의 외손자인 팍파는 1270년 元 쿠빌라이의 스승이 되어 티베트 대리 통치를 위임받기도 하였다.
또한 이 팍파는 몽고의 八思巴문자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이와같이 사캬파는 元朝를 배경으로 후에 카규파가 정치적 힘을 얻기까지 티베트의 정치적 실권을 잡았다.
카규파는 聖포(990-1139)를 개조로 하는 파와 마르파 (1012-96)를 출발로 삼는 두 파가 있다. 특히 마르파는 인도에 유학하여 나로파로부터 나로6법을 배우고, 마이트리파로 부터는 大印의 비법을 배웠다고 한다. 나로6법이란 심신의 훈련을 비롯해 마음을 타인에게 옮기는 등의 여섯가지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대인의 비법과 함께 카규파의 중요한 교리를 이룬다. 마르파는 부인을 두고 세속적인 삶을 영위한 것으로 알려지지만 그에게는 종교시인으로 유명한 미라래파(1040-1123)라는 제자가 있다.
이 미라레파의 생애는 그의 자서전적인 詩인 <十萬歌謠>와 <미라레파전>에 묘사되어 널리 티베트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미라레파의 주요제자 가운데 감포파(1079-1153)가 있으며, 그는 미라레파로부터 나로6법과 대인의 비법을 배우고 1121년 감포에 승원을 건설하여 제자를 양성했다. 감포파는 본래 카담파에서 구족계를 받은 인물로 그의 저술은 카담파의 道次第 설과 카규파의 대인설을 통일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 감포파 이후 카규파는 카담파의 현교적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감포파의 제자인 뒤숨켄파(1110-93)와 팍모두파(1110-70)로부터 각각 카르마派와 팍모두派가 생겨나 정치적 사회적으로 유력했다.팍모두파 계통인 야르룽 지역의 랑씨는 1354년 팍모두파 왕조를 탄생시켜 그후 1세기정도 티베트를 지배했다.
또한 카르마파는 한 씨족에게만 의존하지 않는 活佛相續制라는 독특한 교단유지법을 만들어 내 교단의 세력을 증진시켜 강력한 종파를 만들었다. 이 카르마파는 정치적으로도 강력하게 되어 후에 게룩파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할 때까지 치열한 싸움을 전개해 간다.
닝마파는 古派란 말이지만, 이는 前傳期에 번역된 탄트라에 의지한다는 의미로 린첸상포 이후 후전기의 신역 탄트라에 의존하는 여러학파(사라마파라고도 함)와 구별된다.
이 파는 전전기의 파드마삼바바를 개조로 받들지만, 실제 교단으로 성립된 것은 11세기 이후의 일이다. 교리적인 면에서는 인도밀교와 중국선이 융합된 형태로 本覺論, 修道無用論 등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大究境이라 일컬어지는 최고의 단계가 성취해야 할 목표로서 이 상태가 곧 성불의 단계라고 주장하였다.
닝마파는 교리적인 이유로 타파로부터 배척받았지만, 14세기 롱첸파 (1308-63)등의 사상가와 나와 대구경등의 교의를 체계화하였다.
게룩파는 티베트에 최후로 나타난 종파로서 후에 달라이 라마를 수장으로 하여 티베트 불교를 대표할 정도의 최대 종파로 성장한다.
특히 게룩파는 간텐寺, 데풍寺, 세라寺, 타시룬포寺의 소위 4대학문사를 중심으로 체계적인 발전을 이루고 티베트 불교학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4대 학문사 중 타시룬포寺만이 총카파 사후 건립된 것으로 다른 셋은 총카파 당시부터 건립되어진 것들이다.따라서 이들 학문사에는 총카파가 생전에 많은 가르침을 받았던 카담파의 상푸寺 영향이 다수 남아있고 특히 현교의 교육과정에 있어 그 영향은 두드러진다.
즉 因明學.般若學.中觀學.律學.俱舍學의 교육과정은 이런 상푸사의 영향을 보이는 것이지만, 이것이 오늘날 티베트 불교학의 튼튼한 초석이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