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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기도해 줄께__혜민스님|♥ 좋은글 나누기

♥ VajraYana ♥ 2012. 5. 19. 15:56

 

스님이 기도해 줄게

 

 

혜민 스님   

 

중국 당나라 말기에 나는 어느 지방정부의 관료였었다. 성공을 향한 패기와 도전 정신이 강했던 나는 약간의 무리수를 두더라도 상사로부터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서 잘 마치려 했고 그러다 보니 어쩌다 이십대 후반의 나이에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살기 위해 남쪽 지방으로 도망을 가야만 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는 이미 결혼해서 딸이 하나 있었는데 남쪽으로 혼자 도망을 가면서 딸에게 제대로 아버지 역할을 못하고 떠나는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었다. 나는 결국 중국 남방 지역의 어느 절로 피신하게 되었고, 나를 숨겨주신 그 절 주지스님의 권유로 불가(佛家)와 인연을 맺고 승려가 된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글을 잘 보고 잘 쓸 줄 아는 사람들이 흔하지 않았던 때라 글을 좀 안다는 이유 때문이었는지 나의 은사스님은 늦깎이인 나를 많이 찾으셨고, 그것으로 인해 나를 향한 사형사제들의 시샘 또한 커서 은사스님께서 열반하시고 나서 나는 그 절을 떠나야 했다. 후에 숲이 가득한 중국 남부의 어느 강가 근처에다 삼하사(森河寺)라는 이름의 작은 절을 짓고 살다가 쉰 살이 되기 전에 병을 얻어 여생을 마치게 된다.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못한 딸을 향한 미안한 마음과 뜻하지 않게 굴곡이 많았던 삶을 통해 느낀 무상(無常)이라는 불가의 진리를 가슴속으로 깊이 새기면서 다음 생을 기약해야 했다.

 

                    *                                                       *

 

내가 앨리스를 알게 된 것은 전생에 내 친동생이지 않았을까 싶은 미국계 중국인 친구 소개 때문이었다. 나는 2003년 중국 북경에서 박사 연구차 공부를 하게 되면서 내 중국어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랭귀지 파트너’, 즉 나에게 중국어를 가르쳐 주고 내가 영어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친구를 구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사람이, 앨리스라는 영어 이름을 가진 대학교 3학년 중국인 여학생이었다. 나보다 열세 살이나 어린 앨리스는 꿈 많고 성격도 발랄한 전형적인 중국 신세대 학생이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하고 있는 외국 유학 생활을 동경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시골에 계신 부모님과 남동생을 많이 걱정하는 효녀이기도 했다.

 

중국어 공부는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나면서 했는데, 내가 학교 수업에서 들은 내용 중 잘 모르는 표현들을 적어와 물어 보면 앨리스가 꼼꼼하게 도와주었고 내가 영어를 가르쳐 줄 차례가 되면 앨리스와 어떤 주제에 관해 프리토킹하는 것으로 진행이 되었다. 내가 살던 북경의 아파트는 대학들이 많은 지역으로 앨리스의 학교 또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초저녁에 근처 배드민턴 연습장이나 카페, 가끔씩 중국 식당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국 대학생들의 호주머니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나이기에 저녁 식사나 카페에서의 차 값을 내가 지불하려고 하면 앨리스는 꼭 자기 몫은 자기가 낸다고 하는 탓에 만나는 장소를 되도록이면 저녁에도 불빛이 환한 대학교 배드민턴 연습장과 같은 돈이 들지 않는 장소로 했다.

 

나는 앨리스를 통해 그 당시 중국 대학생들의 꿈과 현실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어렵게 집에서 붙여주는 넉넉하지 않은 적은 생활비와 여덟 명이 같이 써야 하는 비좁은 대학 기숙사 생활 속에서도 앨리스는 졸업 후 외국계 회사에 취직하는 꿈을 꾸고 있었고, 가능하면 대학원 공부도 더 하고 싶은 소망도 가지고 있었다. 북경에 3년 가까이 살았으면서도 북경의 관광명소를 나보다도 더 가 보지 못해 나와 가끔 판자유엔(潘家) 마켓이나 북경 서쪽 근교에 있는 절들을 구경 다니기도 했다. 나의 영향 때문인지 앨리스도 불교에 점차 관심을 갖게 되었고 가끔씩 나를 만나 본인의 중국 남자친구와의 문제점을 토로하고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랭귀지 파트너로서 만나는 것도 앨리스가 졸업을 앞두고 입사 준비를 하면서 점차 그 숫자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로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다 보수가 상당히 좋은 어느 북유럽 회사의 영어 통역 임시직으로 들어가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직장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 내가 자신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면서 행운을 가져다준 덕이라며 첫 월급을 받고 비싼 음식 대접을 받았다. 그 후 나는 두 해 동안의 북경 유학을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박사 논문을 완성하면서 앨리스와는 가끔씩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내가 앨리스를 다시 만난 것은 북경올림픽이 있던 2008년 초여름이었다. 학회 참석차 잠시 북경에 들러 만난 앨리스는 상당히 많이 변해 있었다. 그동안 앨리스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고, 오랫동안 사귀었던 남자친구와도 헤어졌으며, 남동생이 중국 군대에 입대를 했는데 훈련 중에 다쳐서 다시 시골 고향으로 돌아와 있다는 것이다. 임시직으로 다녔던 유럽 회사에서도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새로운 직장을 찾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꿈 많고 생기 넘치는 앨리스의 발랄함이 질곡의 세월로 인해 많이 수그러든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내 앞에서 애써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이십대 초반에 갑자기 집안의 가장이 되어 버린 그녀에게 지난 3년간은 참으로 힘겨운 나날이었을 것이다.

 

저녁 식사를 하고 헤어지는 자리에서 앨리스가 말했다. 내가 예전에 행운을 가져다준 것처럼 요번에 나를 다시 봤으니까 이제부터는 좋은 일이 생기지 않겠느냐고. 그 순간 불현듯 내 전생의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죽기 전에 몇 번의 서신 교환을 통해 가끔씩 전해들은 소식으로 얼마나 그애가 못난 아버지로 인해 힘든 삶을 살았어야 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앨리스, 이제부터는 좋은 일만 있을 거야. 스님이 기도해 줄게.” 택시를 타고 가라고 손에 쥐여준 얼마 되지 않는 돈을 한사코 거절하고 앨리스는 기다렸다가 집을 향한 버스 위에 올라탔다. 떠나는 버스 안에서의 앨리스의 모습을 보면서 인연이라는 생각과 가슴 한구석에서 밀려오는 애잔한 마음과 과거의 일들이 눈가에 고인 눈물과 함께 나도 모르게 뒤범벅이 되었다.

 

스님들의 글은 대개 글 안에 있는 부처님의 어떤 가르침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독자분들이 괜찮으시다면 이 글만큼은 어떤 가르침을 일부러 불어 넣으면서 마무리 짓고 싶지 않다. 굳이 언어로 표현하지 않아도 무수한 인연의 실타래를 풀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과정 자체가 바로 가장 자연스러운 가르침이 아닐까 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