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漫步人生 - [密敎人物思想史 Part_6] - 금강지 삼장...!

♥ VajraYana ♥ 2011. 5. 27. 09:37

 

 

6. 금강지 삼장


1)금강정계밀교의 최초 중국전래자

금강지삼장은 금강정계밀교(金剛頂系密敎)를 최초로 중국에 전래한 사람이다. 그를 금강지삼장이라고 이름하는 바와 같이 불교의 학문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영험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삼장(三藏)이란, 부처님의 설법 중 수행에 대한 방법과 이론(교리)을 집성한 경장 (經藏)과 수행생활의 규칙 즉, 계율에 대한 말씀을 모은 율장(律藏), 그리고 후세 훌륭한 승려들이 쓴 경장과 율장에 대한 해석서인 논장(論藏)의 셋을 합하여 칭하는 말이다.

대장경(大藏經)이라고도 하는 이러한 삼장(三藏)에 통달한 사람을 삼장법사(三藏法師)라 하고, 그사람의 이름에 삼장이란 칭호를 붙여 호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금강지삼장이라 했을 때 금강지는 불교의 모든 학문에 통달한 학승(學僧)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그러한 이론에 대한 부분뿐만 아니라 사(事)로써도 영험하지 않음이 없어금강지가 번역하는 총지(總持), 인계(印契) 모두 다 영험이 있다. 라고 「송고승전」에서 전할 정도이다.

그 외에 그에 관한 여러 전기에서도 어릴 때 부터의 영험한 사례가 기록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능력으로 인도밀교 특히 금강정계 밀교를 중국에 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는데 그것은 당시 중국 당나라 사회가 밀교에 대해 단지 재앙을 막고 복을 구하는 제재초복(除災招福)과 현세이익의 세속적 주술능력만을 기대하던 요청에 부응해 가면서 성불을 구하는 출세간적 목적을 가진 밀교경전을 자연스럽게 전파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비를 청하는 청우법(請兩法)이라든가 죽은 사람을 소생시키는 주법등의 능력으로 당시 조야(朝野) 의 두터운 신뢰를 얻은 다음 금강정계의 밀교를 그들에게 전하였던 것이다.

2) 출생과 수학

금강지삼장의 전기는 730년에 지승(智昇)이 편집한 「개원석교록」9와 「속고금역경도기」 및 「정원석교목록」14에 기록되어진 「대당동경 대광복사 고금강삼장 탑명병서」「고금강삼장행기」 그리고 「송고승전」을 참고로 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금강지는 671년 중부인도의 이사나말마왕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10세때 나아란다사에서 출가하여 적정지(寂靜智)를 스승으로 해서 성명론(聲明論) 즉, 법문학을 배우고 15세때에 서부인도로 가서 법칭론(法稱論)을 4년동안 배운 뒤 다시 나아린다사로 돌아왔다. 20세때에 구족계를 받고 6년사이에 대·소승의 계율, 반야등론, 백론, 십이문론등 본격적인 대승 중관학파(申觀學派)의 논서학습에 매진했다. 28세때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하셨던 카피라바스트에서 승현론사(勝賢論師)로부터 유가, 유식변중변론(辯中邊論)등 유식(唯識)계통의 학문을 닦아 대승불교 전반에 통달했다. 대승불교에 정통한 그가 31세때 남부인도로 가서 용지보살에게 7년간 시중들면서 「금강정유가경」「비로자나총지다라니문」 등 밀교경전을 배우고 오부관정(五部灌頂)을 받음으로써 밀교와 본격적으로 인연하게 되었다. 비밀술법에 교묘하며 만다라를 그리는 데에도 통달하고, 음식물을 공중에서 내리고 금강살타가 항상 눈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3) 당나라로 건너감

남부인도에서 용지보살로부터 밀교를 배우고 관정까지 받아 밀교의 정식 상승자가 된 금강지삼장은 다시 중부인도로 돌아갔으나 여기에서의 활약상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고, 그 뒤나라승가보다말마왕의 청에 의해 남부인도로 간 삼장의 활약상이 「행기」와 「탑명병서」 에 보인다. 여기에서 금강지삼장은 당나라에 가서 밀교를 전하고자 결심을 한다. 중국에의 개교(開敎)에 꿈으로 부풀어 있던 삼장이 국왕에게 그 뜻을 전하나 왕은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다. 그러나 마침내 그의 결심을 움직일 수 없음을 안 왕은 그를 허락하고 장군 미준나를 함께 보내어 「대반야경」을 비롯하여 당나라 왕실에 바칠 남부인도의 여러가지 보물을 실은 배를 지휘케하고 금강지삼장을 전송하였다.

세이론섬에 도착한 삼장은 국왕 실리실라의 환대를 받고 한달동안 머문후 다시 배를 타고 한달간의 항해 끝에 스마트라에 도착했다. 여기서 5개월을 머부른 후 북으로 향했다. 남지나해에서 뜻밖에도 폭풍을 만나 함께 떠난 배 30척 가운데 삼장이 탄 배만이 가까스로 광주(廣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는 인도를 출발한지 3년이 지난 후였다. 719년 장안(長安) 에 들었다가 칙명에 의해 자은사((慈恩寺)에 유숙한 후 천복사(薦福寺)로 거처를 옮겼다.

거처하던 절에서는 관정(灌頂)을 행하는 도량(道場)을 세워 밀교에 접하는 기회를 만드는 등 적극적으로 밀교전파의 활동을 펴나갔다. 그 다음해는 낙양으로 들어갔으나 이후 낙양과 장안 사이를 왕복하면서 열성적으로 밀교선포활동을 하고 723년 부터는 몸소 가져 온 밀교경전을 번역했다.
741년 71세의 고령에 달한 삼장은 오래부터의 염원인 귀국을 실행하려 하였으나 낙양의 광복사(光復寺) 에서 병을 얻어 그해 8월 15일 귀국의 원을 풀지 못한 채 입적에 들고 말았다.
정통제자로서는 불공(不空)이 있고, 그 외에 자은사의 의복(義福), 숭양사의 일행(一行)등이 있다.

4) 번역한 경전 및 의궤

「금강정유가중약출염송법」4권, 「칠구지달니경」, 「금강정경만수실리보살오자심다라니품경」, 「관자재여의륜보살유가법요」, 「금강정경유가수습비로자나삼마지법」, 「천수천안관세음보살대신주본」,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주본」, 「부동사자다라니비본법」등 다수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