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漫步人生 - [密敎資料] - 한국밀교의 역사...!

♥ VajraYana ♥ 2011. 7. 10. 08:50

 

한국밀교 역사

효 봉 (진각종 교법부장)


우리나라의 밀교사는 아직까지 사료의 부족으로 그 완전한 모습을 다 알아 볼 수는 없으나, 앞 사람들의 연구를 근거로 하여 간략하게나마 그 흐름의 대강을 소개하여 보고자 한다.

1. 신라의 밀교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서기 4세기 후반으로 바로 신라, 고구려, 백제가 막 대립하던 이른바 삼국시대였다. 그래서 불교는 시기적으로 각각 달리 삼국에 전래 되었다.
고구려에 처음 불교가 전해진 것은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의 王 부견이 僧 순도와 더불어 불상 및 경전을 보내온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또 백제에 전해진 것은 침류왕 원년(384)에 진나라로부터 호승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바다를 건너 백제로 와서 불교를 홍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신라에는 법흥왕 15년(528)에 고구려로부터 온 사문 묵호자에 의해서 불교가 전해졌다고 한다.
그로부터 백년쯤 지나 7세기중엽에 이르러 부분적이나마 소위 밀교가 전래되어 신인종이 성립되게 된 것이다. 신인종의 종조는 명랑으로 신라 선덕여왕 원년(632) 당나라에 가서 밀법을 배우고 선덕여왕 4년, 당태종 정관 9년(635)에 신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불설관정복마봉인대신주경(佛說灌頂伏魔封印大神呪經)≫등을 가지고서 신인(神印)의 비법을 전하였다고 한다. 신인비법은 문두루(文豆樓)비법이라고도 부르며, 문두루란 무드라(mudr ), 인계(印契) 즉 신인이란 말로 일종의 방위신(方位神)을 그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671년 경주 낭산의 남쪽에 있는 신유림에서 밀단(密壇)을 설치하고 오방신상을 봉안하고서 유가승 12명과 함께 문두루비법을 실수(實修)하는 것으로 침략한 당나라 군선들을 모두 침몰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인종의 개조(開祖)로서 추앙되었고 거기에 사천왕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또한 유명한 김유신과 함께 지은 경주의 원원사(遠願寺)는 통일신라시대에 문두루비법의 중심도량이었다.
명랑과 같은 시대에 밀본(密本)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주술에 능하고 선덕여왕을 비롯하여 재상(宰相)의 병도 가지(加持)하여 영험을 보게 했으며, 그외에 여러 가지 기적을 나타내어 널리 민중을 귀의(歸依)토록 하였다고 한다.
크게 융성한 신라불교에서는 고승이 잇따라 나타났는데 현교로써 대표적인 것은 원효의 법성종, 보덕의 열반종, 자장에 의한 계율종, 의상이 홍포한 화엄종, 진표의 법상종등이 있었고, 밀교로써 이 시대에 성립된 종파로서 총지종, 신인종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고려말까지 계속 그 세력을 이어 왔다고 생각된다. 신인종에 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여기서 총지종은 지념종이라고도 하며, 신라 문무왕(661∼681)때에 혜통이 개창한 밀교종파이다. 혜통은 발심하여 출가한후 당나라에 가서 선무외삼장에게서 법을 구하였으며, 신라에 돌아온 후에 밀교적인 위치에 서서 양재치병(攘災治病)의 비술을 시도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덜어주므로 그 시대에 백성들 사이에서 매우 숭앙을 받은 분이었다. 그리고 이능화 선생의 조선불교통사에서는 혜통을 진언종의 개조이다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혜통이 당나라에 간 시기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지만, 체계적으로 조직된 밀교가 선무외, 금강지 삼장에 의해서 중국에 전래되기 이전에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밀교가 전파되어 완전한 밀교의 도래(渡來)를 바라는 기운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알수 있다.
체계화 된 밀교를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들여온 사람은 신라 영묘사의 僧, 불가사의(不可思議) 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사람으로 당(唐)개원년(開元年)에 선무외삼장에게 가르침을 받아서 《대일경》을 깊이 연구하여 공양차제법(供養次第法)에 대하여 직접 듣고 받아 구결(口訣)을 기록하여 《대비로자나경공양차재법소(大毘盧遮那經供養次第法疏)》 두권을 찬술하였다고 한다.
또 신라승 현초(玄超)도 선무외삼장에게 태장법을 배워 이것을 당나라 청룡사에 있는 혜과 아사리에게 전하였다. 그리고 혜초는 오천축을 주유(周遊)한후, 당나라에 돌아와 금강지와 불공삼장을 모시고 오로지 밀교를 연구하였다. 이와같이 신라로부터 많은 이름있는 스님들이 입당(入唐)하여서 밀교를 배워 직접, 간접으로 신라에 들여왔던것이므로 밀교가 신라에서 번성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유물로서 경주의 불국사, 대구의 동화사 및 영주의 비로사 등에 지금도 현존하고 있는 금강계 대일여래나 십일면관음 등의 석상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밀교사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완전한 체계를 갖춘 밀교를 홍포시킨 사람은 신라의 혜일(惠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혜일은 건중 2년(781)에 신라에서 僧 오진(悟眞)과 함께 당나라에 가서 장안의 청룡사 동탑원에서 밀법을 융성시키고 있던 혜과화상의 문하에 들어가서 선무외계통의 체계적인 밀교를 배웠다. 일본의 홍법대사보다 20년이나 앞서서 입당하였던 것이다. 오진은 그후 중천축에 가던중 티베트에서 병으로 사망하였지만 혜일은 《대일경》, 《금강정경》, 《소실지경》의 삼부비법과 제존유가 삽십본을 전수 받아 신라로 돌아왔다고 되어있다. 이러한 혜일이 그 당시의 고승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적이 우리나라의 문헌에 아직까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사의할 정도이며 현재 우리가 찾아내어야 할 가장 큰 연구과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라 경문왕 4년(864)에 주조된 금강계대일여래상이 현재 강원도 철원에 있는 도피안사에 있다는 것을 비롯하여 앞에서 언급한 불국사, 동화사, 비로사 그리고 충북 각연사, 전남 보림사등 전국에 걸친 여러 사찰에 아직도 신라때 만들어진 금강계비로자나불상들이 건재하여 있다는 것을 보아서도 신라에 체계화된 밀교가 전파되어 융성하였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고 또한 이와함께 밀교의 진언다라니가 널리 백성들 사이에 보급되어 일반상식으로 되어있었다고 하는등 이상의 모든 것을 요약하여 볼 때, 우리나라의 밀교사는 신라의 명랑, 혜통, 혜일의 삼대사(三大師)가 밀교의 교상(敎相)과 사상(事相) 즉, 교학적 이론과 실제수행방법을 신라에 전파했던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고려의 밀교

태조왕건은 특히 승 도선을 존경하여 그의 가르침을 받음과 동시에 불교를 완전히 국교로 하였다. 개경에 7층탑을 세우고 서경에는 9층탑을 짓고 왕륜사, 흥국사, 개국사 등 16개 사찰을 건립함으로써 널리 불교를 융성하게 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왕권의 표시를 불법 융성속에서 나타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불법이 크게 흥융하였던 것이다.
고려 3대 정종 (945∼949), 4대 광종, 8대 헌종, 11대 문종(1046∼1083), 문종의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 등과 같은 열렬한 불법귀의자들을 배출함으로써 고려시대 불교의 전성기를 쌓게 되었다.
밀교도 이와함께 크게 번성하게 되었지만 일반적으로 교학의 진흥은 보이지 않고 사상(事相)면으로 치우친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 특히 혜통 계통의 밀교에 있어서 그러한 현상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명랑계통의 밀교의 전승은 소재도량(消災道場), 문두루도량(文豆婁道場), 대일왕도량(大日王道場) 등의 설치에서 볼 수 있고, 혜일계통의 밀교는 고려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정도량의 설치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어떠한 극악중죄이더라도 이 도량에 들어오게 되면 죄장은 소멸되고 성불하는 인을 맺게 되는 곳으로써 국왕을 위한 관정도량도 설치되었다. 어느것이나 이 모두는 밀교의 홍포를 증명하는 것이 된다.
고려사에서 밀교에 관한 사료를 약간 살펴본다면, 태조왕건이 건국초기에 해적의 침입을 받게 되었는데 신인종에 속한 광학(廣學), 대연(大緣) 두 대덕으로 하여금 양재(攘災)의 비법을 수행하게 하였고 그위에 또 개성에 유명한 현성사를 건립하여서 밀교의 근본도량으로 하였다. 또한 태조2년에는 밀교승인 홍범대사가 인도에서 고려로 왔는데 왕은 위의를 갖추어 법가로써 그를 영접하였다 한다. 문종때에는 변경에서 난이 일어나 28년 신인종의 사천왕사에서 문두루도량을 설치하여 오랑캐를 물리쳤으며 인종 5년, 밀교승 묘청이 상소하여 처음으로 관정도량을 상안전에 설치하였다. 관정도량은 그뒤에 강종 원년, 원종 10년(1269), 충렬왕의 즉위직후에도 설치되었다고 한다.
또한 아타파구신(阿 波拘神)도량, 염만덕가위노왕신주(閻滿德迦威怒王神呪)도량, 대불정오성(大佛頂五星)도량 등도 설치되어 재앙을 물리치기를 기원하게 하였다. 또 강원도 원주군 본저전동, 폐령전사, 주촌평, 충남의 장곡사 등에 있는 금강계대일여래상을 비롯하여 범자의 봉자를 새긴 향로등 많은 유물에서 고려시대에 밀교가 번성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고려시대의 불교의 성격을 말한다면 왕실불교, 의식불교, 법화불교였다. 6대 성종 13년 북방 거란의 침입등 인접한 제세력과의 항쟁, 또 3대 고종18년(1231)부터 31대 공민왕 까지 몽고에 예속된 시대를 맞게 되는 등 여러번의 위기를 맞게됨에 따라 기우(祈雨), 재병(除病), 양재(攘災)이외에 양병화(攘病火), 양왜적(攘倭賊)등 극히 다망함과 함께 법회의 개최는 최성기를 맞이하게 되어 밀교는 더한층 성행하게 되었지만 장엄한 의식행사를 통하여서만 현실의 고뇌를 해결하려고 함으로써 교학적인 면의 배경을 수반하지 않은 밀교의 실천행은 마침내 그 체계적인 발전의 기회를 잃게 된다.
그런데 그 시대의 다른 종파에서는 세 사람의 저명한 승려가 나왔다. 대각국사 의천, 보조국사 지눌, 태고보우의 세 승려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시대에 우리 밀교계에서는 교학의 진흥을 위한 유명한 학승이 탄생되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3. 이조의 밀교

이조시대는 숭유배불(崇儒排佛)의 시대이다. 태종 6년(1406)에는 밀교의 신인종을 삼론, 법성종을 의미하는 중도종에 합하여서 중신종으로 교종에 합병시키고, 총지종 즉 다라니종은 율종인 남산종과 합하여 총남봉으로 선종에 흡수되었다. 이렇게 밀교계의 두 종파는 선교양종에 흡수 통합되어 버린 것이다. 거기에다 태종17년(1417)에는 그것마저도 폐쇄하여 밀교에 관한 많은 전적을 불태우고, 밀교의 홍통(弘通)을 공식적으로 완전히 금지하였다.
이리하여 밀교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독립된 종파로서의 그 위치를 잃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교의식과 진언다라니는 여전히 각 사찰과 민중들 사이에 유통되어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를 증명하는 것으로 성종 16년(1485)에 발행된 총집문(總集文), 미묘비밀대불정다라니(微妙秘密大佛頂多羅尼)등 많은 진언집과 경남 해인사, 충북 법주사, 전남 송광사, 경남 통도사등에 있는 비로자나불상, 전북 보상사에 있는 오불이 새겨진 향로등 이시대의 많은 유물이 현존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그 뒤를 이어서 매몰된 밀교를 중흥시키기위해 진각종등 밀교종단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