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내의 모든 생명체를 살아있게 하는 생명의 근원, 모든 힘의 근원은 무엇인가. 아마도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우주 세계 속에는 이 생명성이 두루 차 있어서 형형색색의 존재들을 존재하게 하고 있다.
우리들이 잘 산다는 것은 이 변만한 생명성에 순응·조화하는 것이요, 우리들이 잘못 산다함은 변만한 생명성에 괴리감을 느끼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계 내에 충문하여 있는 생명성, 이를 대생명이라 불러도 보고, 법신불이라 불러도 보고, 법신비로자나불이라고도 불러 보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라 부르든 명칭에 관계없이 영원히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들은 가능한 한 그 실체를 그대로 표현하여 보려고 노력할 뿐이다.
법신은 진리의 몸이란 의미인데 우리 인간이 몸으로써 이렇게 살아있듯이 대생명은 대생명이라는 몸을 가지고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표현한 것이다. 불(佛)이란 부처란 뜻이다. 법신이나 불이나 동격의 말이지만. 법신의 생명내용 즉 대생명의 생명 내용도 각각이 불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데서 붙인 말이다.
부처란 어원적으로 깨달은 자라 풀이하지만, 이것도 인간적인 면에서 표현한 말이고, 그 속에는 완전한 존재 다 갖춘 존재라는 뜻이 숨어 있다. 즉 법신 대생명에 순응·합일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이란 개체적인 면에서 대생명을 자각하는 면을 강하게 품고 있는 말이다. 법신비로자나불도 법신인 비로자나불이라는 뜻이고, 비로자나는 널리 비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빛과도 관계가 있는 말로써, 옛부터 우주에 충만하여 있는 것은 빛이며, 이 빛은 그대로 우주를 살리는 생명력임을 인식하여온 데서 따 온 이름이다. 빛은 곧 생명의 원동력이라는 인식에서 연유한 것으로 이 생명력이 우주에 변만하여 있다는 것이며, 그대로 대생명, 전일생명으로 일컬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 대생명인 비로자나부처님의 생명 내용으로서 그 생명력을 이어받아 살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그대로 우리들의 생명 근원이요, 원천임을 자각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법신비로자나불에게 귀명의 마음을 다하고, 우리들이 돌아가야할 영원의 생명, 이상의 모습으로 회원한다. 그리고 법신불은 그 실체, 그실체가 가진 속성, 그 속성을 가진 실체의 운동의 세가지 측면에서 인식될 수 있으며, 이를 체(體. 본질)와 상(相, 성질)과 용(用, 활동)으로 부르고 있다. 또한 실체, 즉 본체는 육대(六大)라는 생명 양식으로 표현되며, 속성, 즉 형상은 사만(四曼)이라는 생명 형태로 상징되고 있으며, 운동, 즉 작용은 삼밀(三密)로 나타낸다.
1. 육대
육대는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식(識)의 육대를 말하며, 이 때의 대(大)란 보통 크다라는 뜻이기 보다는 무한히 큰(maha), 그래서 우주에 가득차 있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육대란 여섯 가지의 큰 것이라는 문자적인 의미는 아니고, 우주에 가득차 있는 여섯 가지 힘, 또는 우주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여섯 가지 생명성을 말한다.
사실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이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가 있어왔고 불교자체에서도 육대(六大) 혹은 사대(四大)라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의 현상을 분석하여 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반 불교에 있어서 육대와 밀교에서의 육대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여기서는 대략 세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하여 볼 수 있다.
첫째 일반불교에서는 우리들의 감각, 즉 육감(六感)에 이해되는 범주에서 흐르는 물, 타고 있는 불 등을 가지고 우주의 근본 본체라 본다. 다분히 구성요소로서의 육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밀교에서는 육대의 성덕(聖德), 즉 우리들의 감각을 초월한 것에 비중을 두고 있다. 예를 들면 견성(堅性, 단단한 성질)·지용(持用, 사물을 가지는 업용)은 지대(地大)이고 습성(濕性, 젖는 성질)·섭용(攝用, 수용·포섭하는 업용)은 수대로 본다. 형상적인 면이 아니라 이면의 실상적인 면에서 보는 것이다.
때문에 둘째로, 전자는 육대 하나를 마치 건축 재료가 여기 저기 있듯이, 육대가 제각기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목수가 건축 재료로 집을 짓듯이 육대도 조건에 따라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밀교에서는 육대는 개별적으로 제각기 여기 저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여섯의 성덕은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육대란 바로 여섯의 성덕이 마치 음악의 화음(和音, 코러스)처럼 조화를 이루고 어울려 활동하고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상태를 육대무애상유가(六大無碍常瑜伽)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무애는 화음처럼 서로 장애가 없이 어울려 있음을 말하고 유가란 상응(相應), 또는 감응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육대는 바로 그렇게 존재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셋째는, 일반 불교에서는 육대를 유한하고 끊임없이 변천하는 색상(色相)으로 보는 것이며, 이에 반하여 밀교에서는 육대를 무루의 법성의 상태로서 이 우주법계의 근본 본체임을 발견한 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 불교에서는 겉으로 나타나 있는 색상 형상으로 육대를 인식하고 있으며 이 육대는 우리들이 부정하여야 할 번뇌의 대상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밀교에서는 속으로 바탕이 되는 실상으로 육대를 인식하여 이 육대야말로 우주법계의 근본 본체이며, 생성·소멸의 창조 활동을 주재하는 주체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란 다름아닌 육대의 성덕의 활동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상들이며, 이를 육대연기(六大緣起)라 부르고 있다. 또한 육대가 연기하여 이 세계가 나타날 때, 육대의 실상은 여섯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로서 활동하는데 이를 육대일실(六大一實)이라 부르며, 육대일실이야말로 세계 창조의 근본 주체이므로 법신불이라 하고 또는 육대법신이라 하는 것이다.
밀교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육대의 양방면을 함께 인식하고 설명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한다. 그 양면이란 우리들의 감각의 대상이 되는 경험계의 실체 사물, 즉 땅·물·불등과, 밀교에서 말하는 감각적 인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 즉 현상에 대한 실재(또는 實相)를 말한다. 이것에 대해 옛날 표현으로는 전자를 수연(隨緣)의 육대, 후자를 법이(法爾)의 육대라 부르고 있다. 법이의 육대란 실재의 육대이고, 수연의 육대는 글자 그대로 실재의 육대가 일련의 인연에 따라서 모습을 나타낸 육대라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감각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육대는 그대로 그렇게 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실재의 육대가 인연을 만나 나타난 구체적인 모습이며 활동 현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달과 달빛의 관계와 같이 공간적인 인과 관계이다. 예를 들면 현재 눈앞에 타고 있는 불이 있다고 하자. 이와 같이 현상하고 있는 불에는 열이 있고, 또 열을 가하는 것에 의해서 사물에 변화를 주는 성질이 있다. 이를 열학이라고 부르지만, 불에는 그 자체에 성질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육대는 무한하고 무애한 성질로서 만유를 만들어 가는데 단순한 존재 요소가 아니며, 일정한 가치 내용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생명성, 또는 생명적 힘이라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육대는 전체적으로 우주적 전체 생명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밀교적 인식 양식이다. 그래서 밀교에서는 이 육대를 여러 방면으로 분석하여 우주적 대생명, 법신불을 표현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온 것이다. 단지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대생명체임을 체험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이 대생명의 근본체는 육대라고 표현되는 생명성에 무애(無碍)하고 유가(喩伽)한 활동임을 이해하여야 한다는 점이며 육대연기 그 실상을 깨친 것이 부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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