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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密敎資料] - 일본 밀교의 역사 ♡

♥ VajraYana ♥ 2012. 8. 8. 05:28

 

나라(奈良)시대의 밀교

나라(奈良)시대에 밀교경전은 거의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잡부밀교의 경전이었고 순수밀교의 {대일경}이나 {금강정경} 계통의 경전은 극히 조금밖에 전해지지 않았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라시대에 겐보오(玄昉 ?-746)라는 법상종(法相宗)을 전한 유명한 스님이 있었는데, 이분은 중국에 십수년간 유학을 하고 덴헤이(天平)7년(735)에 일본으로 돌아올 때, 번역된 [일체경(一切經)] 5,000여권이나 되는 엄청난 경론을 가지고 왔다고 하는데, 이는 덴헤이 시대에 이미 중국어로 번역된 경전류는 거의 가지고 왔다는 것이 된다.
그 속에 잡부밀교의 경전이 대부분 들어 있고, 그래서 나라(奈良)시대의 학자가 그것을 서사(書寫)하고 공부하는 것도 비로소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2. 천태밀교

나라시대에 전해진 잡밀은 일본밀교라 할 수 없다. 일본밀교라는 것은 평안(平安)초기에 傳敎大師 최징(最澄, 767∼822)과 弘法大師 空海(774∼835) 등이 중국에서 부법전승한 순밀을 조직 체계화 시킨 천태밀교와 진언밀교를 말한다.
최징은 공해보다 약간 선배로서, 두 사람은 延歷23년(804)에 동시에 입당구법하여 일본에 밀교를 전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받아온 밀교는 순밀이지만 쌍방의 밀교관에는 기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우선 천태의 밀교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1)최징의 밀교
최징은 궁중의 파견승으로서 입당하자마자 천태산에서 天台를 부법하고 가르침을 수법하였는데, 아울러 大乘戒, 禪 등을 배웠다. 다음 해에 돌아올 때까지의 남은 시간을 이용하여 당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던 밀교에 눈을 돌려 順曉에게서 태장계의 밀법을 부법하고 太素등으로부터 잡밀법을 받았다.
그리고 연력24년(805) 7월 많은 밀교경궤, 法具등을 가지고 돌아와서 9월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傳法灌頂을 高雄山寺에서 개단하고 천태종을 성립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최징은 천태의 부법과 교리를 중국에서 전래한 것이 주이고, 그 부가적인 것으로서 밀교를 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밀은 최징 이후의 円仁, 円珍에 의해 정식적으로 밀교로서 전승되고 본격적인 전개를 보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2) 원인· 원진의 밀교
원인의 밀교의 특색은 東密(공해의 계통을 이어받은 밀교)에서는 金胎兩部不二로서 양부는 일법의 양면관임을 그 원칙으로 하지만, 胎密(최징의 계통을 이어받은 밀교)에서는 胎金兩部不二의 세계는 소실지에 있다고 하는 3부 건립의 밀교를 전수하여 태밀의 특색으로서 내세운 것이다.
또한 최징의 밀교관은 현밀을 일치한다고 보지만 원인은 현밀은 사상적으로는 일치하나 실천면에서는 밀교가 우수하다고 하는 理同事勝의 교판을 수립하였는데 이 점이 원인의 밀교관이 가지는 특색이다.
원진은 寺門派의 조사로 교학사상은 원인의 밀교관을 계승하고 있지만, 교판론은 五時敎判을 세우고 밀교를 제5시의 설로 하였다. 태밀에서는 원진이 오로지 밀교를 중요시한 것같이 보고 있으나, 밀교 선양의 한 방편으로서 결코 顯劣密勝을 세운 점이 그의 특색이다. 태밀에서는 원진이 오로지 밀교를 중요시 한 것같이 보고 있으나, 밀교 宣揚의 한 방편으로서 결코 현열밀승의 교판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었다. 원인이나 원진 모두 円密一致가 그 진의였다. 본존관도 大日, 석가의 2불일체로 하였다. 이상이 원인, 원진의 밀교관이다.
또 태밀에 있어서 교학사상의 전개상에 간과할 수 없는 사람은 五大院 安然(841∼915)이다. 안연은 원인의 제자로서 태밀교학의 대성자라 할 수 있다. 안연은 事敎二相을 겸학한 학승인데 교상에서는 오시오교판, 사일십문판을 세워서 일본천태의 교판을 확립하였다. 안연의 저작은 90여 부라 하나 대표작으로는 <五時問答>·<菩提心義>·<悉曇藏> 등을 꼽을 수 있다.

3. 진언밀교

일본밀교가 성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홍법대사 공해에 의한 진언밀교의 조직 체계화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해는 입당유학승으로 공해가 탔던 배는 폭풍우 때문에 난파해서 福州에 표류하다 수개월 후에 장안에 도달했다고 한다. 다음 해 청룡사 혜과를 만나 금태양부의 관정을 받고 순밀의 전법대아사리위를 얻어서 진언부법의 적자가 되었다. 이해 12월 5일 혜과가 시적하자 공혜가 혜과의 비명을 찬하여 썼다는 것은 유명하다.
공해는 장기간의 유학예정을 변경하여 다음 해 大同원년(806) 10월에 돌아왔다. 佛具 9종, 금태양부만다라도상 10축, 아사리부촉물 13종, 경궤논소장 216부 460권을 가져왔다. 대동2년에 유학기간 동안의 연구를 정리하고 弘仁원년(810)에는 청량전에서 卽身成佛을 현증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해 국가를 위하여 법을 닦고 동대사 別當이 된다. 弘仁3년에는 최증을 비롯한 승속 145인에게 관정을 받고 순밀의 선양에 힘썼다. 弘仁7년 고야산을 수선도량으로 하사받고 가람을 세우고 동14년에서 동사를 받아 국가의 총보리도량으로 만들었다. 天長5년(828)에 綜藝種智院을 설립하고 서민교육의 이상을 실현했다. 동7년에는 <十住心論>·<秘藏寶 >을 찬하여 진상하였는데 진언종이 종단으로서 교권을 확립한 것은 이때라 할 수 있다. 天長9년(832) 고야산 금강봉사에서 조용히 지내며 동사, 고웅산사를 제자들에게 부촉하고 오로지 삼매에 주력하였다. 仁明 承和원년(834) 宮中眞言院을 창전하고 다음 해 정월 후7일수법을 닦았다. 그리고 동년 3월 21일 고야산에서 입정에 들어갔다.
공해는 인도에서 일어났던 순밀의 정통을 혜과에게 부법전승하여 일본밀교로서 조직 체계화했을 뿐만 아니라 문학, 예술, 서예, 교육, 철학, 사회복지 등 모든 면에서 일본 문화사상 실로 위대한 지위를 차지하며 공헌하고 있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공해의 밀교관의 기반은 법신대일여래의 실재관을 확립한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법사대일여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삼밀행을 닦고 入我我入觀에 들어가면 삼밀가지의 불가사의력에 의해 부모로부터 받은 이 육신을 가지고 그대로 卽身成佛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해는 2경 1론 8개의 증문을 들어서 단지 진언법문에서만 즉신성불이 가능함을 구명하고 <卽身成佛義> 1권을 저작했다.
대일법신불의 실재를 기조로 하여 순밀의 문화사상 체계를 확립한 것이 <弁顯密二敎論>·<秘密曼茶羅十住心論>·<秘藏寶 > 등의 저작이다. 6경 3론을 전거로 하여 법신대일여래의 汎佛論的인 실재를 논증하였다. 그는 법신대일여래를 중심으로 하는 순밀사상의 체계화는 물론 순밀에서 설하는 만다라관에 바탕을 두고 공해 자신의 종교체험의 內景을 설시한 것이라 받아들여지나, 객관적인 정세로서는 平安 초기의 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사상, 종교, 문화를 통섭하여 조직적으로 체계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4. 천태밀교(태밀)과 진언밀교(동밀)의 차이

비예산의 최징의 밀교를 태밀(台密)이라 하고 공해의 계통을 받은 밀교를 동밀(東密)이라한다. 동밀여서는 대일·석가 별체(別體)로 한다. 즉 대일여래와 석가여래는 별체이다.
밀교는 교주 대일여래의 설, 현교는 석가여래의 설로 한다. 그런데 태밀에서는 대석동체(大釋同體)로 한다. 즉 대일여래와 석가여래는 동체이다. 천태에서 설하는 삼신사상도 석존을 떠나지 않는다.
동밀에서는 현열밀승(顯劣密勝)의 현밀차별관(顯密差別觀)에 서 있다. 현교는 顯略의 가르침, 방편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열등하다. 밀교는 심비(深秘)의 가르침, 진실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우월하다.
한편 태밀에서는 현밀일치라고 한다. 최징은 圓·密·禪·戒의 4종 겸학이다. 원교 즉 법화일승(法華一乘)과 밀교를 동일하게 본다. 곧 원밀일치(圓密一致)라고 한다.
동밀에서는 금태양부불이(金胎兩部不二), 일법의 양면관이라 한다. 태밀에서는 태금양부불이(金胎兩部不二)의 불이(不二)의 세계는 소실지에 있다고 하여 3부를 세운다. 상승설도 다르나 대체로 이상이 동태이밀의 기본적인 차이점이라 여겨진다. 이상으로 일본밀교의 대강을 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