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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密敎資料] - 중국밀교의 역사 ♡

♥ VajraYana ♥ 2012. 8. 8. 05:26

 

1. 중국밀교의 위치와 성격

중국의 밀교는 밀교경전의 번역과 더불어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그 토대가 된 것은 인도의 밀교와 서장의 밀교라 할 수 있다. 중국에 있어서의 밀교는 당대(唐代)에 그 최성기를 이룬다. 그 중에서도 교의적으로 그것을 대성한 사람은 불공삼장이었다.
불공의 입멸 후에 중국밀교는 점차로 세력을 잃었으나 도교등의 민간신앙을 수용하면서 민간층에 깊이 파고 들었다. 특히 밀교는 국왕·왕족·환관, 군벌 등의 귀의를 받았으므로, 저 유명한 무종의 법난의 영향을 받아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당대(唐代)의 금강지(金剛智)·선무외(善無畏)·불공(不空)등에 의해서 교의와 행법이 중국에 전해지자 진언밀교로써 꽃을 피웠는데, 한편 양재초복(禳災招福)하는 위력을 발휘하는 독특한 불교로서 황제·왕족을 비롯하여 세상사람의 주목을 끌게 된 것이다.
흔히 중국의 밀교가 인도에서 비롯되어 중국을 거쳐서 한국이나 일본 등지로 유파되면서 실천체계가 확립되었다고 하여 과도적인 위치에 있다고 하나, 불공(不空)이나 혜과(惠果) 이후의 중국 밀교학자들은 충분히 밀교교의를 체계화하여 이를 국가적으로 실천하였으니, 중국밀교로서 가지고 있는 위치는 매우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할 것이다. 밀교는 중국에 있어서 수세기에 걸쳐서 중국 민중의 신앙이 되었고, 특히 도교와 민간 신앙과의 결합은 중국민중의 뿌리가 되는 신앙으로서 깊은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2. 밀교경전의 역출 (삼국시대에서 초당시대까지)

인도에서 성립한 밀교경전은 다른 일반적인 불교경전과 함께 일찍부터 중국에 전해져서, 삼국시대부터 서진, 동진, 남북조시대(200-600년경)까지 많은 역경자에 의해서 50여 종류의 밀교경전이 역출되었다. 그런데 수(隋)에서 초당시대(600-700년)까지 거의 100년 사이에 급격히 인도밀교경전이 성립한 듯이 그들 밀교경전이 많은 번역자에 의해 역출되어 그 경전의 수는 거의 60여 종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밀교경전에 의해서 밀교적인 불타관의 다양성과 의궤에 의한 수법, 진언.주(呪).다라니의 지송과 그 공덕의 신앙 등 밀교의 특색있는 제양상(諸樣相)이 중국불교계에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초당시대에는 그 새로운 밀교에 주목하는 경향도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밀교라는 한 종파가 성립하기에는 미흡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밀교의 수행법 등을 구체적으로 지도할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3. 중국밀교의 성립(中唐以後)

그러나 중당이후(700년대)가 되면 즉신성불의 사상과 실천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순수밀교의 경전이 중국에 전해져 역출되고, 또한 밀교의 실천적인 수행방법이 전해집니다. 그것이 많은 문제(門弟)에 전해지게 되어, 비로소 중국사회 속에 새로운 밀교라고 하는 한 종파가 성립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중국밀교라는 한 종파를 탄생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분들은 다름과 같습니다.

⑴ 선무외(善無畏 : 637-735 )
먼저 첫번째가 선무외 삼장입니다. 선무외는 [슈바카라싱하Subhakarasimha]의 번역인데 동인도 마갈타국 왕가(王家)의 출신이며, 나란다(Naianda) 절에서 달마국다(達磨 多)에게 {대일경} 계통의 밀교를 배워 인도에서 이미 밀교의 아사리(阿舍梨 acarya;軌範師. 正行이라 번역하며, 제자를 敎授하고 제자의 행위를 바르게 하여 그 궤범이 될 수 있는 스승을 말하는데, 밀교에서는 만다라 및 제존의 印明에 통달하여 傳法灌頂을 받은 자를 말함.---譯註)로써 유명했던 분입니다. 80세의 고령으로 개원4년(716)에 중앙아시아를 거쳐 장안에 도착했습니다. 그후 장안과 낙양의 두 곳을 왕래하면서 그사이에 {대일경} {소바호동자경} {소실지경}등 20여 종류의 밀교경전을 번역하고 또한 밀교의 수법 등을 많은 문제(門弟)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⑵ 금강지(金剛智 : 671-741)
다음이 금강지 삼장입니다. 원명은 바즈라보디(Vajrabodhi)라고 하는데 중인도 왕가(王家)에 태어나 나란다 절에서 대승불교를 배우고 남인도에서 용지(龍智)보살(密敎付法相承의 第4代 祖師)을 만나 밀교를 배웠습니다. 바닷길로 해서 중국의 남쪽지방에 도착하고, 개원7년에는 중국에 이르러 그 익년 개원8년(720)에 장안까지 온 것입니다. 선무외보다 4년 정도 늦었으나 선무외와 거의 때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강지는 {금강정약출염송경(金剛頂略出念誦經)}(4卷) 등 {금강정경} 계통의 20여 종류의 밀교경전을 번역했습니다.
선무외와 금강지 두 사람은 모두 인도에서 이미 밀교의 아사리로서 밀교를 수법하여 밀교의 의식을 모두 체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이 중국에 와서 바로 제자들을 기르고 밀교의 수법과 관정의식, 그리고 만다라를 그리는 방법 등을 제자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에 중국밀교의 성립에 제1기는 선무외와 금강지에 의해서 그 기초가 다져졌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⑶ 일행 (一行 : 683-727)
또한 이무렵에 일행선사가 나와서 중국밀교의 수용과 성립에 커다란 업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중국의 학자로서 금강지와 선무외의 양쪽에서 배웠는데, 특히 선무외에 대해서 {대일경}의 번역을 도왔고, 더우기 진언밀교의 대표적인 주석서인 {대일경소(大日經疏)}(20卷)를 저술했습니다. 그러나 일행선사는 선무외, 금강지보다 빠른 727년에 45세의 아까운 나이에 입적한 수재였습니다. 일행선사는 원래 천태의 학자로서 밀교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동시에 천문학. 역법학(曆法學)에도 정통하여 유명한 {개원대연력(開元大衍曆)}을 만드는 등 이 부문에도 매우 많은 저작을 남기고 있습니다. 현재 중국에서는 일행선사를 종교가보다도 과학자로써 커다란 엄적을 남긴 사람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고, 북경의 역사박물관에 가면 [과학자 일행(一行)]이라고 한 동상이 있습니다. 아무튼 이것이 중국밀교성립의 제1기에 해당됩니다.

⑷ 불공(不空 : 705-774)
제2기는 불공삼장입니다. 불공은 범어 아모가바즈라(Amoghava-jra)의 역명인데 바라문의 혈통을 이은 인도 사자국 사람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를 따라 남양의 여러 나라로 다니다가 쟈바에서 금강지삼장의 제자가 되고, 개원8년 16세 때 스승을 따라 중국에 왔습니다. 금강지삼장을 모시고 역경에 조력하고, 밀교를 배워 양부(금강계와 태장계)의 대법과 밀교의 깊은 뜻을 계승하여 부법(付法)의 조사가 되었습니다. 개원19년(731) 금강지가 입적한 뒤에 그의 뜻을 이어 인도의 아릉국(阿陵國)을 거쳐 사자국의 불아사(佛牙寺)에 있으면서 보현(普賢)아사리에게 밀교의 대법을 전해 받고, {금강정경} 계통의 여러 경과 논을 가지고 다시 중국에 돌아와서 밀교를 전하고 경론 번역에 종사하게 됩니다. 700년대 후반은 오직 이 불공삼장이 중심이 되어 밀교경전의 번역과 수법을 성하게 하여 많은 제자를 두고, 또한 밀교의 사찰을 여러 곳에 건립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불공삼장의 시대에 비로소 중국의 다른 종파와 비교하더라도 불공의 밀교쪽의 세력이 우세하게 되고, 당의 후반에 밀교가 왕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데에는 밀교와 당의 왕실과의 밀접한 관계도 있었지만, 그 외호에 힘입어 중국밀교는 급격히 발전해 가게 된 것입니다.

⑸ 혜과(慧果 : 745-805)
청룡사의 혜과는 어려서 출가하여 장안의 청룡사 동탑원에 머물렀다. 그는 불공으로부터 <금강정경>을 받고, 선무외의 제자인 신라승 현초(玄超있)로부터 태장법과 소실지법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법을 전수받고 금태양부(金胎兩部)의 밀교를 선양하였다. 그는 태장계의 천부(天部)를 통폐합하고, 또한 금강계도 구회의 만다라에 통합하여 태장계에 대치시키니, 정연한 화면을 구성하는 대만다라를 만들었다. 이때에 신라로부터 혜일(惠日)·오진(悟眞)등이 입당하여 혜과아사리에게서 이 혜과의 밀교를 전수받아 가지고, 혜일은 신라로 돌아가서 밀교를 전했으며, 오진은 정원(貞元) 5년(789)에 인도로 법을 구하러 가는 도중에, 중앙아시아의 티벳에서 병사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일본의 쿠카이(空海)도 입당하여 혜과아사리로부터 양부에 걸친 밀교를 전수받아 이 밀교를 일본에 전하였다.

(6) 혜랑(惠郞)
혜랑은 숭복사에 있었는데, 불공삼장의 만년에는 이 혜량의 이름이 크게 나타난다. 불공의 제자중에서 함광(含光)·혜초(惠超)가 있었으나 그들은 나이가 많아서 세상을 떠났고, 혜과는 나이가 너무 적었으므로(불공보다 41세나 적음, 혜과로서 불공의 정적(正嫡)이라고 하여 제7조(第七祖)로 삼은 것은 혜과의 제자의 저작에서 보이는 것이다) 혜랑이 사실에 있어서 불공의 법을 잇게 된 듯하다.
한편 중국의 밀교를 봄에 있어서 위에서 보아온 바와 같은 밀교의 흐름과는 다른 또 다른 흐름이 있었으니 그것은 반야삼장(般若三藏)과 찬령(贊寧)의 밀교다. 무종의 회창법난(會昌法難)이후 현저하게 위축된 밀교의 활동은 중당(中唐)에서 만당(晩唐)으로 넘어가는 무렵에 크게 활약한 번역승이 있었으니 그는 반야삼장이다.

(7) 반야(般若)
반야삼장은 선무외·금강지·불공등이 전한 통밀교의 신봉자는 아니었다. 그가 번역한 경전에서는 특이한 사상이 보이는 것이다. 그는 혜과와 같은 시대에 인도로부터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들어갔다.
그는 소승경전, <구사론> <대비바사론> 등의 논서를 배웠고 중관, 유식을 공부하고 나서 다시 남인도로 가서 밀교를 접하게 된다. 그는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건중(建中) 2년에 광주 근처에 표착하여 동 3년 장안에 도착한다.
그가 번역한 밀교관련 경전을 살펴보면,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 10권>, <수호국계주다라니경 10권>, <조탑연명공덕경>, <제불경계섭진실경 1권>등이다. 반야는 중국 밀교의 쇠퇴기에 처하면서 불교의 중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의 공로를 살펴보면, 첫째, 그가 역출한 경전들은 당대의 번역사의 최후를 장식하는 것으로서 한편 그가 번역한 경전은 인도의 범본을 가지고 그대로 충실히 번역한 것이 아니고, 거기에 다른 요소를 가미하였다.
둘째 그가 번역한 경전에 나타나는 호국사상의 바탕이 되는 사은설(四恩說)에서 국왕을 호지함으로써 불법을 부촉하려는 방편이 보인다.
세째로는 반야는 <금강정경>계통의 밀교에 조예가 깊었으나, 불공(不空)이나 혜과(惠果)와 같이 밀교의 교리와 실수법을 겸수하여 이를 실천하려는 밀교가는 아니고, 진호국가에 의해서 밀엄국토와 즉신성불을 이룩하려는 방편을 구사했다.

(8) 송·요대의 밀교
당이 멸망한 후 여러왕조의 흥망이 있다가 宋이 건국된다. 송대의 현저한 밀교의 사적은 천식재(天息災)등의 밀교승이 와서 역경원을 창건한 것을 들수 있다.
천식재가 번역한 <대승장엄보왕경>은 라마교에서 특히 행해지고 있는 관음육자명(觀音六字明)의 경전이다.
시호(施護)의 <일체여래진실섭대승현증삼매대교왕경>,<일체여래금강삼업최상비밀대교왕경> 법현(法賢)의 <유가대교왕경>등이 있다.
한편 북방의 遼에서는 각원(覺苑)등에 의해서 밀교가 행해졌다. 각원은 화엄경과 대일경을 융합하고, 금강정경을 주체로 한 밀교를 설하였고, 법오(法悟)도 화엄경에 정통했으나 일반 대중의 해탈을 위해서는 밀교를 중요시하였으니, 요대의 밀교는 화엄사상을 기반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