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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密敎人物思想史 8] - 금강정계 밀교의 상승자(相承者) - 불공삼장 ♡

♥ VajraYana ♥ 2012. 8. 2. 01:23

 

8. 불공삼장

1) 밀교경전 번역가

하나의 사상이 그 발생지에서 부터 다른 지역으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그 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언어가 전달되어야 한다. 더욱이 두 지역의 언어가 서로 다르다면 전달하고자 하는 지역의 언어로 번역되어져야 한다. 만일 아무리 고매하고, 훌륭한 사상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언어화 되지 않는다면 다른이들에게 전달될 수 없을 것이며 또 그 언어가 그 지역에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면 사람들이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그 언어는 무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사상을 언어로 표현하고, 다른 지역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표현된 언어가 그 지역 언어로 번역 되도록 하여야 한다.


불교라는 사상을 표현하는 언어는 불교경전 즉, 불경이다. 때문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불경을 전하고 또한 번역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인도 승려들은 중국에로의 불교전파를 위해 인도에서 중국으로 많은 불경을 가져왔고 둘째 불경의 한문변역에도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밀교전파를 위해 밀교경전을 중국으로 전하고 번역하기에 노력을 아끼지 않은 인도승려가 지금까지 언급했던 금강지삼장과 선무외삼장등 이다.

이제 지금 언급하고자 하는 불공삼장은 많은 번역가들 가운데에서 후세 사람들이 그들을 「3대 번역가」(구마라집 삼장, 현장삼장, 불공삼장)라고 할 정도로 방대한 양의 불교경전을 번역한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특히 불공삼장은 번역된 경전의 내용이 금강정경의 기본경전인 「진실섭경」을 비롯한 밀교의 경전이었으며 그 중 금강정계의 경론이 압도적이었던 점으로 미루어봐서 금강정계 밀교를 중국에 전파하려고 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2) 금강지의 제자

불공삼장은 AD 705년에 태어났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설이 많은데 그 가운데 남천축의 집사자국(지금의 스리랑카)에서 태어났다는 설과 서역지방의 사람이다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삼장은 일찌기 조실부모하고 외숙부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하다가 13세가 되면서 숙부를 따라 당나라의 장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다음 다음해 즉, 15세때에 당시 당나라에 금강정계 밀교를 전파하던 금강지삼장을 만나고 제자가 된다. 20세 때에 광복사에서 스승인 금강지삼장으로 부터 유부(有部)의 방식으로써 구족계를 받는다.

출가자에게 수여하는 계()에는 전통적으로 두가지로 크게 나누는데 하나는 사분율(四分律)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유부율(有部律)의 방식이다.
이 가운데 역사적으로는 사분율의 방식이 일반적이지마는 밀교에서는 유부율의 방식을 중요시하고 있다.

그 이후에 금강지삼장은 불공삼장에게 밀교의 법을 전하게 부법(付法) 되는데 이에 관한 이야기가 「송고승전」등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구족계를 받은 뒤 계율이라든가 산스크리트 어학에 정통했기 때문에 불공삼장은 밀교를 배우고 싶다고 스승인 금강지삼장에게 희망했으나 좀체로 허락이 나지 앉는다. 3년동안을 기다려도 허락을 얻지 못한 불공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본고장인 인도에서 밀교를 배우려고 동쪽을 향해 길을 떠난다. 불공이 떠난 뒤 어느 날 밤, 금강지지삼장은 불보살이 떼를 이루어 동쪽으로 향해 가는 꿈을 꾸었다. 불공이 없어졌으므로 불보살들이 뒤를 좇아 수도를 떠난 셈이다. 금강지삼장은 이 꿈으로 불공이 큰 그릇인 것을 알고 급히 되불러와서 밀교의 부법(付法)에 달려들었다.

이 이야기는 불공삼장이 밀교의 전통을 잇기에 가장 합당한 인물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려 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부법전」에서는 불공삼장을 금강정계 밀교의 상승자(相承者)로서 기록하고 있다.

3)호국사상

741년 금강지삼장이 세상을 떠난다. 그후 불공삼장은 인도여행을 두 차례나 하게 되는데 이 때에 많은 밀교경론을 구해 당나라로 돌아와 번역에 전념하면서 밀교의 정착을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황제인 현종은 열렬한 도교의 신봉자였으므로 밀교가 조야에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속에서 불공삼장은 힘을 다하여 국가보호로서의 밀교의 깃발을 선명하게 올리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특히 755년 안록산의 난리를 평정한 불공의 공적으로 인하여 조정에서 불공의 세력은 증대되었고 현종·숙종·대종의 3제와의 사이가 극히 친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불공삼장으로부터 밀교의 주술력에 의한 국가보호를 기대했었고, 삼장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면서 밀교를 국가불교의 지위로까지 끌어 올리려 하였던 것이다.

황제와 궁중귀족의 절대적 후원과 많은 뛰어난 제자를 가지고 중국불교를 밀교화하려는 야망을 남모르게 실행해 가던 불공삼장이 774년 7O세가 되면서 병석에 눕는 일이 많이지더니 드디어는 6월 11일 입적하고 만다. 이리하여 밀교를 형식과 내용에서 인도 본래의 모습을 완전히 탈피시켜 중국풍으로 재정비한 업적을 남긴 불공삼장은 50년간의 불교활동에 종지부를 찍고 만다. 그의 법을 이어받은 6인의 제자로는 함광, 혜초, 혜과, 혜랑, 원교, 각초 등이다.

4) 번역경전

중국에 있어서 밀교경전의 번역자 중에 불공삼장의 번역경론은 수량적으로 단연 타인을 압도하고 있다. 질에 있어서도 금강정경의 기본적인 원문을 번역하였고 이 계통의 밀교를 이식, 소개하는데 큰 공적을 남겼다. 또한 불공삼장의 번역상의 공적은 다라니를 한 문자로 쓰기 위해 산쓰크리트어와 한문자의 엄밀한 음운(音韻)의 대응조직을 확립한 것이다. 실로 중국의 음운학에 대해서도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할 만 하다.

번역한 경전은 「진실섭경」, 「일자정륜왕경」등 101부 143권에 달한다.